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실리콘밸리 노트] ‘비트윈 잡스’를 응원하며

비트윈 잡스(between jobs). 말 그대로 일(job)과 일(job) 사이, 즉 직업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영어 표현이다. “새 직장을 찾고 있다” “잠시 쉬고 있다”, 혹은 자조 섞인 투로 “놀고 있다”라고 말할 때 사용한다. 나는 이 표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최근 2년 동안 미국 테크 기업들은 50만명 이상 대량 감원을 했고, 16년 넘게 구글에 몸담았던 나도 그 영향을 받았다.     나는 구글에서 나와 ‘갭 이어(gap year) 프로젝트’ 목적으로 트레이더 조 슈퍼마켓 직원, 스타벅스 바리스타, 공유운전 택시 운전사, 애완동물 돌보미, 그리고 컨설턴트 일을 했지만, 나의 본래 전문 영역인 마케팅·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선 지난 1년 반이 ‘비트윈 잡스’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생생하게 경험한 것을 공유하고자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알바생이 되었습니다』라는 책을 썼다. 이 이야기가 공감을 얻으면서 지난달에는 한 유명 TV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행운을 얻었고, 미국 유수 매체인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인터뷰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제 1년 반의 비트윈 잡스를 마무리하면서 배운 점을 정리해 보았다. 첫째, 인생의 변화는 정말 계획하지 않을 때 올 수 있다. 변화를 수동적으로 맞이할 수도 있고,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환영할 수도 있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고, 그 마음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둘째, 변화 앞에서는 회복 탄력성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 회복 탄력성은 평소 훈련된 루틴으로 키울 수 있다. 루틴의 힘을 느껴보자. 셋째, ‘천천히 가도 괜찮고, 둘러가도 괜찮고, 쉬어가도 괜찮아’라는 심리 관리다. 가령 30, 40대는 축구로 친다면 아직 전반전이다. 결승골은 후반 5분을 남겨 놓고, 혹은 연장전에서 자주 나온다. 조급해지지 말자.   무엇보다 지난 비트윈 잡스 기간에 배웠던 것은 연대의 힘이다. 올 5월부터 ‘비트윈 잡스 24’ 모임을 시작했다. 비트윈 잡스 모임은 그야말로 ‘일과 일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 위로하고 동기부여를 하는 모임이다. 본인이 원하지 않은 때, 혹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때 회사를 떠난 사람들은 대부분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탄다. 용기와 위로가 필요한 시점에 혼자 앓이를 하는 것이다.     필자도 같은 경험이 있기에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을 보는 것이 마음 아팠다. 잠수 타는 이들을 수면 위로 올려내고 싶었다.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터놓고 얘기하면 일단 마음이라도 가벼워진다.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의 삶의 방식과 경험에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구직 팁이나 채용 정보도 공유하게 되고, 추천 채용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5월에 첫 모임 공지를 페이스북에 올렸다. 열댓 명 정도 모이면 카페 한구석을 빌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글을 올리자마자 하루 만에 100명 넘게 신청을 했고, 이삼일 새 150명 넘게 신청이 들어왔다. 다행히 지인들이 공간을 무료로 빌려줘 첫 모임을 무사히 가졌다. 왜 비트윈 잡스 모임이 폭발적이었는지는 모임 참석자들과 이야기하면서 대번에 알았다.   “이런 모임이 없습니다. 떠밀리듯 회사에서 나오니 이전 회사 동료들도 만나기도 싫고, 늘 취업 걱정을 하는 가족들과도 이야기하기가 부담스러웠습니다. 별일 없이 직장 다니는 친구들도 만나기 싫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피하게 되더군요. 이런 모임 정말 기다려왔습니다.” “저는 이 모임이 6개월 만에 사람 만나러 나온 첫 모임입니다.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힘든 과정을 어떻게 겪어내고 있는지 다양한 경험을 들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내가 계획하지 않았고 원하지 않았던 비트윈잡스 기간 동안 오히려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 하루하루 루틴을 지켜가면서 새로운 인생의 챕터를 준비하고 있다는 이야기, 나를 다시 정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비트윈잡스 기간은 ‘날 것의 나’를 만났던 시간이었고, 그러면서 썩 괜찮은 자신을 재발견한 시간이기도 했다. 예기치 못한 변화 앞에 귀중한 ‘인생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비트윈잡스’를 응원한다. 정김경숙 /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실리콘밸리 노트 비트윈 잡스 비트윈잡스 기간 비트윈 잡스 모임 참석자들

2024-08-26

[실리콘밸리 노트]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왜 달리는가

“로이스 님의 끝없는 에너지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직장생활 30년 동안, 그리고 최근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알바생이 된 스토리’가 알려진 후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늘 한결같이 대답한다. 평소에 가꾸어온 체력이라고. ‘에너지 발전소’라는 별명을 가진 나는 커리어 멘토링을 할 때마다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잘러’의 기본은 체력이다”, “20대는 깡으로 버티지만 40대 되면 체력 없으면 절대 못 버틴다”, “새로운 생각과 도전은 체력에서 나온다”, “체력이 있어야 친절한 엄마, 아빠도 될 수 있다” 등을 입에 달고 산다.   미국, 특히 실리콘밸리 지역에선 어디를 가도 길거리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많다. 5년 전 실리콘밸리로 옮겨온 뒤 가장 먼저 든 동호회가 달리기 클럽이었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구글 본사가 있는 마운틴뷰 소재 러너스클럽에 나갔다. 검도와 아침 조깅으로 운동을 해왔던 나는 운동도 운동이지만 ‘실리콘밸리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알고 싶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스무명 정도 클럽 참석자 중 절반은 테크 회사들에서 근무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스타트업 창업자 혹은 벤처캐피탈리스트같은 전문 투자자들이다. 둘러서서 간단히 자기소개와 준비 운동을 한 후엔 각자 속도에 따라 정해진 코스로 10㎞ 정도 달린다. 달리기를 마친 후에는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늘 인상적인 것은 운동에 대한 그들의 진심이었다. 체력 관리의 중요성에 대해선 다들 철학이 있다. 그들이 꾸준한 운동과 체력 관리에 대해 공통으로 말하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다른 사람과 운동을 같이하는 동호회에 참가한다. 이들은 생활의 일부로 달리기와 웨이트닝을 매일 하면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정기적으로 러너스클럽에 참석해 다른 사람들과 운동을 한다. 혼자 하면 지루함과 단조로움으로 운동을 빼먹거나 중단하기 쉽지만, 운동모임에 나오면 지속력이 높아진다. 또한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면서 다른 산업이나 회사 상황에 대해 지식을 갖게 된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투자자를 우연히 만나는 비즈니스 기회가 되기도 한다.   둘째, 운동 스낵킹(snacking), 즉 간식 먹듯이 하는 짧은 운동을 일상 속에 집어넣는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연이은 회의로 오후쯤 에너지가 고갈되고 집중력이 흐려지는데, 이때 ‘파워 간식’ 먹듯이 짧은 운동을 한다. 자리에서 스트레칭, 플랭크, 팔굽혀펴기 등을 한다. 5~10분이라도 컴퓨터 스크린에서 눈을 떼 몸의 호흡과 근육에 집중하다 보면 다시 에너지가 생긴다. 러너스클럽에서 자주 만난 한 전문투자자는 아침에 주식 마켓이 시작되면 1시간 이상 자리를 비우면서 운동을 하기가 어려워서 두시간마다 알람을 맞춰놓고 짬 날 때마다 운동을 ‘간식처럼 먹는다’고 한다.   셋째, 정신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러너스클럽에서 만난 사람들은 부사장 직급이든, 일을 막 시작한 새내기이든 매일 일이 주는 중압감과 사람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속에서 살고 있다. 특히 2022년부터 실리콘밸리를 강타한 대량 감원으로 열 명이 하던 일을 대여섯명이 해야 하고, 팀원을 두었던 디렉터들도 팀원 없이 1인 기여자로 일하게 되었다. 업무량도 업무량이지만 언제 정리해고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아침마다 이메일을 여는 것 자체가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제품 개발, 수익 모델 고민, 조직 운영, 클라이언트 관계 등 일상의 무엇 하나 그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운동하는 동안이라도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어 심리 관리가 된다. 여러 번 창업에 성공한 한 스타트업 투자자는 “수많은 고민과 생각을 안고 달리기를 시작하지만 마칠 때면 복잡한 생각이 정리되어 2개 정도만 남는다”라며 창업자들에게 달리기를 권유한다.   실리콘밸리 사람들은 각자 다른 일상의 스케줄을 갖고 있지만, 공통으로 운동과 체력관리에 우선순위를 둔다. 애플 CEO 팀 쿡은 “운동을 하면 건강뿐만 아니라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운동 시간을 확보하는 것은 내 개인뿐 아니라 우리 회사의 우선순위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자녀 5명을 키우는 워킹맘인 수잔 워치스키 전 유튜브 CEO도 “나는 아침 일찍 운동한다. 머리를 맑게 해주고 에너지를 주기 때문에 하루를 준비하는 시간이다”라며 아침 운동을 예찬했다. 필자도 낮에는 여러 가지 실리콘밸리 아르바이트 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쓰고, 또 한국 스타트업 컨설팅을 하면서 갭이어를 보낼 수 있던 원동력은 아무리 바빠도 매일 달리기나 걷기, 수영, 검도 등으로 땀을 흘리면서 키워왔던 체력이었다. 체력이 되어야 결국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 운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정김경숙 /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실리콘밸리 노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창업자들 실리콘밸리 알바생 실리콘밸리 지역

2024-07-04

[실리콘밸리 노트] 구글 임원이 실리콘밸리 알바생 된 사연

“2년 후에 그 남자랑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 남자가 나를 먼저 찼다.”   정리해고된 느낌이 어땠느냐고 물으면 딱 이런 느낌이라고 대답한다. 2023년 초 구글이 발표한 1만2000명의 정리해고 명단에는 5년 전 미국에 와서 공들여 만들어 키운 팀의 구성원들과 필자가 포함됐다. 미국에서 직장인 두 명 중 한 명꼴로 경험할 정도로 기업의 정리해고는 흔하지만, 막상 당사자들이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밤사이 이메일 한 통으로 해고 통보를 받았던 필자도 누구나 겪는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이라는 슬픔의 5단계를 겪었다. ‘이메일이 잘못 보내진 걸 거야’, ‘하필 왜 나야’를 거쳐서 ‘그래, 이런 기회를 살려서 못 해본 것들을 해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곤 바쁘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직장생활 30년 만에 ‘갭이어(gap year)’라는 걸 갖기로 했다. 이 갭이어 동안 ‘실리콘밸리 N잡러’가 되었고, 이 경험을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알바생이 되었습니다』라는 책에서 공유했다. 꼭 정리해고가 아니더라도 실직, 이별, 질병 등 예기치 못한 변화 속에서 인생의 주도권을 다시 잡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첫째로, 평소 해보고 싶었던 것을 찾아 ‘갭이어 프로젝트’를 만들어보자. 이런 기회가 언제 또 오겠냐는 생각으로 말이다. 필자는 정리해고 통보를 받자마자 지난 30년 동안 하고 싶었지만 회사 일에 매여 못 했던 것을 노트에 적어 보았다. 그 결과 하고 싶었던 일들의 공통점은 나 자신이 제품의 한 부분이 되어 고객들을 직접 만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 ‘1만명 만나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아마존 대항마로 떠오르고 있는 미국 슈퍼마켓 1위 기업인 트레이더 조의 계산원(캐셔), 스타벅스의 바리스타, 공유 차량인 리프트 서비스의 운전사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지난 1년 동안 1만명 이상을 만났고, 직접 걸은 거리도 미국 동서 횡단 거리보다 먼 5000㎞ 이상이었다. 몸소 체험하면서 얻은 다양한 산업에 대한 지식과 인사이트는 현재 프리랜서로 하고 있는 기업 컨설팅 일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둘째, 루틴을 지속하자. 갑자기 생활의 중심이었던 회사를 떠나게 되면 텅 비게 되는 캘린더와 이메일 함이 자신을 허전하게 만든다. 자신의 가치가 부인되는 것처럼 느껴지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자칫 자존감이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럴 때 자기가 계획한 것을 지속적으로 하는 루틴이 필요하다.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도서관 가고, 사람 만나고, 이력서 다듬고, 인터뷰(면접) 준비를 한다. 평소에 바빠서 못했던 자원봉사도 해보고, 독서클럽 모임이나 취미 모임도 나가 본다. 영어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영어 공부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좋다. 이런 루틴으로 캘린더를 채워보자.   셋째, 적극적으로 주변에 알리고 사람을 만나자. 한국에서는 자의든 타의든 일자리를 잃었을 때 외부에 알리기를 꺼린다. 그러나 직장인에게 평소에도 중요한 네트워킹은 이럴 때 더욱더 중요하다. 예기치 못한 변화로 자존감이 상하고 감정 동요를 겪을 때 주변 사람들과 터놓고 얘기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이럴 때 네트워킹은 실제로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주변 사람에게 내가 어떤 직장을 찾고 있는지, 혹은 어떤 갭이어 프로젝트에 관심이 있는지 알림으로써 구직 활동에 도움을 받거나 프로젝트 동료를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직장에 지원할 때 내부 직원의 추천도 받을 수 있다.   2023년 초 구글의 정리해고 당시 일자리를 함께 잃었던 한 동료는 당시 임신 5개월이었다. 살인적인 뉴욕의 렌트비와 생활비 걱정과 의료보험 자격 상실로 인한 병원비 걱정으로 심리적 충격이 심했다. 그러나 이 동료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알리면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후 그 동료는 임신 중 정리해고를 겪은 사람들에게 심리상담과 재정 상담을 제공하는 모임을 만들어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이처럼 예기치 못한 변화 속에서도 서로 돕고 의지하는 연대의 힘은 중요하다.    필자의 갭이어는 ‘뼛속까지 구글러’란 애칭으로 구글에서 16년간 있었던 나 자신을 들여다본 계기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험보다는 안정성을 택하고, 나 개인의 가치가 아닌 회사 명성에 기대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그래서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아르바이트가 된 지난 1년은 계획하지 않은 변화로부터 다시 인생의 주도권을 찾은 신나는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이제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구글, 나를 놓아줘서 고마워!” 정김경숙 / 전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실리콘밸리 노트 실리콘밸리 알바생 실리콘밸리 알바생 구글 임원 정리해고 통보

2024-05-19

[실리콘밸리 노트] 실리콘밸리 해고 칼바람과 실버라이닝

3년 전 미국 본사로 옮겨와서 팀원들을 뽑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은 ‘정말 잘 뽑았다’고 생각한 유능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다른 친구들보다 일을 더 잘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기 고용 안정성에 대해 불안해하며 “괜찮냐”고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알고 보니 그 친구는 과거 근무했던 직장들의 구조조정으로 본인 뜻과 상관없이 연거푸 회사를 떠나야 했었다. 미국 직장인 2명 중 1명꼴로 구조조정에 의한 해고를 당한다는 데이터를 보니 그 불안이 이해됐다. 이렇게 해고가 흔하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해고된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본인 잘못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해고(fire)와 회사 구조조정에 의한 해고(layoff)를 명확히 구분해서 사용한다. 그리고 이제 2022년과 2023년. 실리콘밸리에는 그야말로 해고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전 세계 거시경제 전망이 불투명한 가운데 경영 효율성이 우선시되면서 작년 말 메타(페이스북 모기업)로 시작된 해고 바람은 재무제표가 탄탄하고 현금 보유량도 많아 큰 걱정 없어 보이던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로 이어졌다. 이 기업들은 각각 1만명, 1만 2000명의 직원을 해고했다. 이들에 이어 세일즈포스, 페이팔, 스트라이프, 델 등 중견 기업들도 대량 해고 대열에 참여했다. 미국 해고 데이터(layoffs.fyi)에 따르면 2022년 한해 미국 테크기업에서만 약 16만명의 구조조정 해고가 있었으며, 2023년에는 두 달 동안 약 13만명의 해고가 있었다. 올해 들어 매주 약 1만5000명의 테크 인재들이 일자리를 잃은 셈이다. 3월 들어서도 크고 작은 테크 기업들의 추가 해고 발표가 계속 나오고 있다. 지난주엔 메타에서 2차로 1만명을 더 감축한다고 발표했다. 더구나 스타트업들의 자금줄로 그동안 실리콘밸리 혁신의 지지대 역할을 해온 실리콘밸리은행(SVB)의 파산 여파로 실리콘밸리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른 해고 바람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런 칼바람 속에서도 실리콘밸리를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있다. 일자리 정보와 네트워크를 제공하는 링크드인(Linkedin.com)에서는 최근 테크기업에서 해고된 사람들이 ‘#layoffs’ ‘#opentowork’처럼 해시태그(#)와 함께 본인 해고 상황을 알리며 일자리 정보를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딱한 상황은 비자 문제가 걸려있는 외국인들 경우다. 인도 출신 엔지니어는 “이제 딱 30일 남았다. 30일 안에 다른 직장을 찾지 못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피가 마른다. 일자리 찾는 데 도움 달라”라고 메시지를 남겼다. 이 메시지에는 100여개 넘는 댓글이 달리며 모르는 사람들조차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찾아봐 주고 연결해주고 있다. 구글을 그만둔 직원들의 알럼나이 모임인 ‘Xoogler(주글러)’는 동료들의 지원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보여주고 있다. 주글러에서는 구글의 해고 발표가 나자마자 해고된 1만2000명을 대상으로 마인드 컨트롤과 명상 등의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또 구직자와 구인자를 연결해주는 네트워킹 오프라인 모임도 만들어 발 빠르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차가운 해고 바람 속에서 따뜻한 인간미와 동료애를 느낄 수 있다.   이번 대형 테크기업들의 대량 해고를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산업계 간 인재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실리콘밸리 테크기업들은 높은 연봉과 카페테리아 공짜 식사나 마사지 등의 최고 복지 시설로 고급 인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큰 테크기업의 대량 해고에 실망한 인재들은 이제 테크 산업뿐만 아니라 다른 산업계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그동안 인재 영입에 목말라 왔던 스타트업이나 다른 산업계에서는 고급 인재 확보에 숨통이 트이는 기회가 된 것이다.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엔지니어들의 이력서가 들어오고 있다고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기쁨의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테크기업들의 대량해고가 이어진 최근 6개월간 미국의 비(非) 테크 기업에서 약 50만명 이상의 인재 채용이 있었다는 데이터가 나오기도 했다.   실리콘밸리의 해고가 불투명한 거시경제 전망 때문이 아니라 경쟁 회사들이 하니 우리도 한다는 ‘모방 해고(Copycat Layoffs)’라는 비판도 받지만, 이번 대량 해고가 그동안 ‘사람부터 뽑아놓고 보자’ 식으로 달려왔던 테크기업들이 뒤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은 확실하다.   인재들의 산업간 이동도 의미 있는 일이다. 구름 뒤에 해가 있을 때 구름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희망의 실버 라이닝처럼, 테크기업들이 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고 효율성을 다져서 더 큰 혁신을 가져오길 기대한다. 또 자리를 옮겨간 테크 인재들이 다른 산업 부문에서 가속할 혁신도 내심 기다려진다. 정김경숙 / 구글 글로벌커뮤니케이션 디렉터실리콘밸리 노트 실리콘밸리 실버라이닝 해고 칼바람 구조조정 해고 해고 데이터

2023-03-26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